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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여수시의 삼복삼파(三復三破) = 역사를 제대로 알자.
 작성자 : 관재수  2016-12-15 20:02:23   조회: 3606   
여수시의 삼복삼파(三復三破) = 역사를 제대로 알자.

작성인 : 여수시발전추진위원회 일자: 2008-01-04

삼복삼파(三復三破)=여수현(여수시)이 순천사람들의 방해 책동으로 세 번 폐현되었다가 네 번째 복현(여수라는 지명을 찾음)을 완성시켰다는 뜻.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500년 마지막 자존을 지켜내서 1397년에 이성계 역성혁명 정부에 5년을 저항했다고 밉다고 여수라는 지명과 함께 폐현시켜서 그 지명을 되찾으려고 500년을 발버둥쳐서 충절 충민의 우리 여수조상의 피맺힌 '여수시 독립운동'인 '여수복현 운동'이다.그래서 1897년에 완전한 복현을 이루어서 가장 먼저 조상들이 기념하여 지은 건물이 1897년에 지은 군자동 여수향교다.

역사가 고유하고 여수민족의 자존이 서려 있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 여수현의 폐현

여말(麗末) 여수지방을 다스리던 오흔인(吳欣仁) 여수현감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자 역성혁명에 불복하는 뜻으로 성문을 굳게 닫고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아니하니(閉城不納) 조선 조정에서는 1397년(태조 5) 여수현을 폐현시켜 순천부에 편입시켜 버렸다. 이로부터 1987년 여수군이 설치될 때까지 501년간 순천부에 속한 백성이면서 여수 좌수영의 졸(卒)이 되어 두 곳에 세금을 내야하고 두 곳으로 부역을 다니다 보니 전혀 틈이 없어 살려고 애를 써도 살수가 없고 죽으려고 애써도 죽을 수가 없다고 운초 정종선 선생의 상소문 말처럼 다른 고장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극심한 폐단 속에서 여수 백성들이 살아왔다는 것이다.

(2) 여수현의 삼복삼파

① 제1차 여수현 복현
백성들의 생활이 이렇게 어렵게 된 동기는 바로 여수현이 없어지고 순천부에 예속되
면서 순천부 백성이니 순천부에 세금을 내야하고 여수 수영의 졸이니 여수 수영에도
세금을 내야하며 두 곳에 부역과 두 곳 관청의 시달림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 백성들은 죽기를 결심하고 복현(復縣)운동을 하게 되었으며 일심월구 현을 되찾는데 온갖 정열을 바쳐오게 된 것이다. 복현운동은 숙종조(肅宗朝)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몇 차례 상소하였으니 묵살되자 여수의 선각지사(志士)인 차동궤(車同軌), 오석사(吳錫詐), 차국태(車國泰), 황성룡(黃成龍) 등 4사람이 서울로 올라가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임금께 직소하였으나 이에 맞서 여수를 복현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있어서 복현이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고를 쳐 직소한 간사한 무리들을 벌주라는 상소가 또 있어 이들만 억울하게 피화치사(被禍致死)된 슬프고 원통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신문고 사건은 다음 소개될 순천 유생 김우하의 상소문에서도 밝혀졌다.

그러나 여수 백성들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복현운동을 끈질기게 추진하였다. 그 결과 1696년 정월 조신 이충립(李忠立)의 건의에 의해서 묘당(廟堂:의정부의 이름)에 논의되고 숙종대왕의 윤허를 받아 여수도호부를 설치케 되었다.

1696년(숙종 22) 전라좌수사였던 최극태(崔克泰)가 도호부사(都護府使)를 겸해 용두(龍頭 : 현 순천시 해룡면), 율촌(栗村), 소라(召羅), 삼일(三日), 여수(麗水) 등 5개면(面)을 관할구역으로 삼고 1396년 여수현이 혁파된 지 꼭 300년만에 천신만고의 고통을 참아가며 여수현을 다시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애써 얻은 여수현을 되찾은 꿈은 1년도 채 못되어 어이없이 깨어지고 어찌된 영문이지 여수도호부사 최극태는 암행어사에 의하여 끌려가고 여수현은 다시 순천부로 환속되고 말았다.

② 제2차 여수현 복현 운동
⼑ 순천 유생(儒生) 박시유(朴時裕)의 여수 복현 상소

조선왕조실록에 박시유가 순천유생으로 되어 있으나 박시유는 여수사람인데 순천유생이라 함은 여수현이 순천에 환속되어 여수현이 없어졌기 때문에 상소를 올릴 때 순천유생이라 했을 것이다.

숙종실록 34권 7쪽을 보면 순천유생 박시유 등이 상소하여 여수의 옛고을을 다시 회복하고 특히 본도의 좌수사로 하여금 한결같이 경기수사가 교동(蕎洞)을 겸한 때와 같이 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묘당(廟堂)에 내려서 의논하게 했더니 시행하지 말 것을 복주(覆奏)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이 상소는 천신만고 끝에 300년만에 옛 고을을 다시 찾았는데 1년도 채 되지 못한 1697년에 여수현을 순천부로 환속한 3년 뒤인 1700년(숙종 26) 3월 9일 숙종실록에 실린 것이다.

⼑ 헌부(憲府)에서 여수현 복현 전계(前啓)
1722년 경종 12월 21일 경종실록 10권 39쪽을 보면 헌부에서 전계(前啓)하기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라도(全羅道)에는 예전에 여수현(麗水縣)이 있었는데, 중간에 수영(水營)을 그 지방에 설치하고, 그 현(縣)을 폐지하여 순천부(順川府)에 예속시켰습니다.

그런데 수영을 이진(移鎭)한 뒤에 수영은 구진(舊鎭)이라고 하면서 잡역(雜役)을 전례에 의하여 침독(侵毒)하고, 순천(順天)은 그의 소속(所屬)이라고 하면서 부렴(賦斂 : 조세를 부과하여 징수함)하는데, 기한을 작정하여 징수합니다. 한 지방의 백성이 두 곳에 끼어서 책응(責應)하게 되어 지탱하여 감당하지 못하니, 순응(順應), 영양(英陽), 자인(慈仁) 등의 고을 예에 의하여 다시 구현(舊縣)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만일 그것이 그렇지 못하면 좌수영(左水營)으로 하여금 겸찰(兼察)하게 하여 두 아문(衙門)에서 침징(侵徵)하는 폐단을 면하고자 합니다.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하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민원(民願)에 의하여 장점을 따라 변통하여서 한 지방의 심한 고통의 위급한 처지를 풀어 주소서."

그러나 임금은 헌부의 전계를 따르지 아니했다. 사헌부에서 임금께 전계(前啓)하게 된 것은 여수 백성들의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상소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 여수현 폐헌 논의
1723년(경종 3) 1월 19일 경종실록 11권 2쪽에 보면 순천과 여수의 현을 폐지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방편에 따라 변통하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나 묘당에서 변통한 사실은 없어 여수현을 순천부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시는 어떤 새로운 상소에 의한 것이 아니라 28일전인 헌부에서 여수현 복현에 따른 전계때 임금께서 따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재고사항으로 보인다.

4) 지평 이근(李根)) 여수현 복현 상소

1725년(영조 1) 8월 6일자 영종실록 7권 25쪽에 지평(持平) 이근(李根)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였는데 먼저 어진 사람을 임용하려거든 의심하지 말고 간사한 사람을 제거하려거든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제적(諸賊)의 죄인이 도망하기 어려운 것을 아시면서도 용서해 주려고 하시는 것은 이름 내기를 좋아하신 것이며 궐정(闕庭)에서 호소하는 것은 미워하고 냉대하면서도 삼사(三司)에 맡기는 것도 또한 이름 내기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순천부(順川府) 여수(麗水)의 백성은 부역(賦役)을 거듭 부담하는 원망이 있으니, 대개 여수현(麗水縣)은 일찍이 수영(水營)의 설치로 인하여 처음에는 혁파(革罷)되었다가 그 뒤에 수영이 옮겨 설치되므로 다시 읍(邑)을 설치하지 못하고 그대로 순천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순천에서는 이를 '속읍(屬邑)'이라 하고 수영에서는 이를 '구진(舊鎭)'이라 하여 많은 폐단이 함께 발생함으로 백성이 살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곧 속히 품처(稟處)하여 여수의 백성이 부역을 거듭 부담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을 제거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임금께서 비답하기를 의논해서 처리할 만한 것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하니 묘당에서 다시 복주(復奏)하기를 여수현을 다시 현(縣)으로 삼고, 청컨대 수사로 하여금 겸무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리하여 여수현이 두 번째 복현을 하여 여수도호부가 설치된 것이다.

여수현이 일차 복현되었다가 다시 폐현되어 순천부에 환속된 후에도 다시 복현을 해야 옳다는 상소와 복현을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맞물려 한 나라의 임금도 그 비답을 심중이 하는 정서속에서 대쪽같은 바른 말로 상소한 지평(持平) 이근(李根)의 상소와 묘당(의정부)의 굳은 신념으로 인해 여수현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수현 제1차 복현 때와 같이 당시 전라좌도 수사 원백발(元百撥)이 여수도호부사를 겸임하게 되었고 관할구역도 1차 복현 때와 같이 용두, 율촌, 소라, 삼일, 여수 5면으로 되었다.

⼑ 지평 이광웅(李光雄) 여수현 폐현 상소

1726년(영조 2) 5월 28일자 영조실록 9권 41쪽에 지평(持平) 이광웅(李光雄)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순천의 여수면(麗水面)에 다시 한 현을 설치한 것은 곧 간사한 백성들이 백방으로 속한 소치이니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상의 확정하여 종전대로 합숙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에 이르기를 여수현의 일은 앞으로 두고 보려고 한다고 하셨다.

⼑ 여수현 설치에 따른 갈등

여수현이 2차 복현된 지 1년만에 다시 여수현을 폐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726년 9월 5일자 영조실록 10권 14쪽에 보면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순천과 여수의 분계(分界)가 편리하지 않은 지를 하문하자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여수는 분읍한 뒤에 폐해가 적지 않습니다. 이미 설치했다가 도로 혁파하는 것이 비록 두서가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사세가 진실로 역파해야 한다면 없애는 것에 구애받을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다시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묻자, 모두들 말하기를 "개혁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번에 문부(文簿)가 호번(浩煩)하기 때문에 미처 조관(照管)하지 못하고서 분속(分屬)하도록 윤허했던 것인데, 여수 부사(府使)에 대한 유서(諭書)를 지어 입계(入啓)함이 당해서야 비로소 뉘우치게 되었다. 마땅히 결단해야 하는데도 결단하지 못한 것은 우유부단(優柔不斷)에 가까운 것이니, 여수를 도로 순천에 소속해야 한다." 이때 장령 이근(李根)이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여수의 분현(分縣)에 관한 일로 상소를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었는데 오늘의 경연에서는 분현을 그르게 여기므로 필경에는 처분을 내리시어 드디어 도로 소속(所屬)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당초에 잘 살피지 않은 잘못이 현저해 졌으니 신을 체직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도 말고 또 퇴대(退待)하지도 말라." 이러한 사실을 증보문헌비고 16권 54쪽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 좌의정 홍치중(洪致中) 건의로 여수현 혁파

영조(英祖) 2년(1726) 순천부(順川府)에 소속된 여수폐현(麗水廢縣)이 그 거리가 본부(本府)에서 조금 멀어서 왕래가 불편하다고 하여 나누어서 수사(水使)겸 부사(府使)를 두었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여수(麗水)를 분읍(分邑)한 이후에 향교(鄕校), 객사(客舍)의 영건(營建 : 집을 짓는 것)과 군정(軍政)의 변통(變通)과 관아(官衙)의 급료를 마련하는 따위의 일에 폐단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뿐만이 아니라 순천(順天)은 옛날에 전선(戰船) 1척(隻)의 선창(船艙)과 또 노젓기와 활쏘기에 능한 군사가 모두 여수(麗水)에 있었는데, 분읍(分邑)된 이후에는 토지(土地)와 인민이 모두 수영(水營)에 속해 있으므로, 본부의 선척(船隻)을 다시 간직하여 둘 장소가 없습니다. 수군(水軍)도 또한 그 인원을 확충하여 정할 방도가 없으므로 순천(順天)은 전선(戰船)을 수영(水營)에 옮기고자하고, 수영(水營)에서는 수영의 선함(船艦)의 수가 많기 때문에 받아서 두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서로 미루고 핑계하여 문서로만 보고(報告)하기를 어지럽게 하는데, 이것이 또 대단히 구애되어 꼼짝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였고, 어영대장(御營大將) 이봉상(李鳳祥)도 또한 "마땅히 파(罷)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그전대로 순천(順天)에 도로 붙이라고 명하였다. 이리하여 어렵게 쟁취했던 제2차 복현도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혁파되었다.

한편 당시 전라좌수사겸 여수도호부사였던 원백발(元百發)수사도 전라감사의 징계로 파직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후일 여수현 복현상소를 올린 운초 정종선은 순천 아전배들이 간사한 꾀를 부려서 이를 훼방놓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③ 제3차 여수 복현 운동

⼑ 김우하(金遇河) 상소

1727년(영조 3) 2월 3일자 영종대왕실록 11권 8쪽에 살펴보면 순천의 유학(幼學) 김우하(金遇河)가 상소하여 순천과 여수를 두 고을로 나누지 않을 수 없는 연유를 말하고 간사한 백성드링 천청(天廳 : 임금의 청문)을 무망(誣罔)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대개 여수백성들이 숙종조(肅宗朝)때부터 여러차례 상언을 올려 고을을 나누기 바라며 북(신문고)을 쳐 등문(登聞)하는데 까지 이르렀는데 임금이 종중감처(從重勘處)하라 명하였다.

⼑ 여수 백성들의 상소

1750년(영조 26) 여수현은 여수도호부로 세 번째 복현되었다. 제2차 복현 후 24년만에 다시 복현하게 된 것은 여수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를 증명한 것이며 또한 여수현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큰 소망인가를 증명한 것이라 하겠다.

운초 정종선의 상소문에 의하면 이번 3차 복현은 여수백성들이 상소하여 임금님께서 밝게 사리를 판단하시고 엄중한 유교를 승지(承旨) 이형원(李馨遠)에게 내려 여수도호부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를 겸하게 하고 다시 경계를 갈라 치정토록 하였다.

그러나 순천 아전배들의 간사한 농간에 다시 1년도 채 못되어 여수현은 혁파되고 순천부로 환속케 되었다고 했다. 실로 복현이 되면 우리 여수 백성들에게는 크나 큰 하늘의 복이요, 순천으로 봐서는 조금 떨리는 것에 불과하다. 여수가 현이 되면 순천부의 인구가 줄어들어 순천부사의 봉급이 1/5이 깎이게 되고 아전들의 권한도 1/5이 감해질 뿐입니다. 이것이 순천 아전배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여수복현을 방해해 온 소위 삼복삼파(三復三罷)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 운초(雲樵) 정종선(丁鐘璿) 상소

운초 정종선 선생은 1811년(순조 10)에 율촌면 월산리 65번지(호산부락)에서 출생하시어 어려서부터 경사에 능통했고, 20세 전후에 소과에 합격했다. 선생은 1864년(고종 원년)에 여수현 복현상소를 올려 삼복삼파 이후 잠시나마 주춤했던 여수 복현운동의 불씨를 당겨 주었다. 선생은 병인양요때 백의로 국란을 맞이하여 남주종유(南州宗儒)로 칭송받는 분이시다.

특히 선생의 상소문 내용의 문장력이 뛰어나 역문을 그대로 수록한다.

운초(雲樵) 정종선(丁鐘璿)의 복현 상소문

순천(順天)에서 여수(麗水)를 떼서 한 현(縣)을 만들어 주소서.

엎드려 아뢰나니 원래 신(臣) 등은 초가집에서 사는 미천한 백성으로서 하루살이나 개미같은 하찮은 목슴이오나 성인의 나라에 태어나 성인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나 옷을 입고 배부르게 밥 먹고 사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다 임금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거리에서 노래부르고 격양가가 드높은 것 또한 이 어찌 임금님의 베푸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태양의 밝음이 비치지 않은 곳이 없어도 음지나 비탈진 그늘에는 미치지 못하고 아무리 봄의 햇살이 따스하다 할지라도 마른나무(枯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는 요순(堯舜)같은 성군도 다 이루지 못하는 딱한 일로 여겼사옵고 되도록 널리 베풀고자 애쓰셨던 일이었습니다.

아! 그러나 남의 눈에 뜨이지 않은 사궁무고(四窮無顧 :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노인이나 부모없는 자식)를 찾아낸다는 것은 치세의 가장 어려운 일로서 옛날 문왕(文王)도 먼저 이 일에 힘썼으며 탕임금을 섬기던 이윤(伊尹)도 일부(一夫)를 구하지 못한 것을 늘 부끄럽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고을의 백성들이 수백년을 두고 한을 품고 살아오면서도 아직 그 한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원통한 일이 있습니다.

신(臣) 등이 사는 고장은 순천부(順川府)입니다. 순천(順天)의 전 구역은 18면(面)인데 그 중에 5면이 있습니다. 즉, 용두(龍頭 : 현 순천시 해룡면), 율촌(栗村), 소라(召羅), 삼일(三日), 여수(呂水) 5면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5면은 원래 여수현(麗水縣)입니다. 지나 온 내력은 신라와 고려때를 지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구역을 갈라서 다스려온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중년에 와 좌수영(左水營)을 여수(麗水)에 설치하고 여수현관(麗水縣官)을 파하고 그 군전(軍田) 양삼안(糧三案 : 모든 제정일체 ?)을 순천에 붙여 버려 순천은 이미 도호부(都護府)가 되고 그 뒤로부터 여수(麗水) 5면은 좌수영과 순천부 사이에 끼어 옛날 등(岋)나라가 제(薺)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끼인 것과 같은 꼴이 되어 순천부에서는 좌수영 밑에 있다하여 잘 돌보지 아니하고 좌수영에서는 또한 순천부에 속한 땅이라 하여 잘 보살피지 아니하고 서로 미루고 있으니 여수(麗水)는 무소비의(無所庇依 :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순천부(順川府)의 백성이요 좌수영(左水營)의 졸인지라 두 곳의 백성 노릇을 하다보니 전혀 틈이 없어 살려고 애써도 살수가 없고, 죽으려고 애써도 죽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또 슬픕니다.

대체 좌수영(左水營)에는 전선(戰船)이 4(四), 병선(兵船)이 5(五), 각선(脚船)이 11(十一)있고 방답진 돌산(防踏鎭 突山)에는 전선(戰船)이 2(二), 병선(兵船)이 2(二), 각선(脚船)이 4(四)이며, 고돌산진(古突山鎭 : 화양면 고진)에는 전선(戰船)이 1(一), 병선(兵船)이 1(一), 각선(脚船)이 2(二)로써 모두 36(三十六)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따른 사포수(射砲手), 능노군(能櫓軍), 대포장사공(大砲匠沙工)들과 수영상이장교(水營上貳將校), 군사령(軍使令), 기수(旗手), 취타(吹打)들도 다 여수백성이 당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돌산(突山), 진례(進禮), 백야곶(白也串) 세 곳에 있는 봉화대도 여수 땅에 있는 고로 여수 백성들로 채우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고돌산진(古突山鎭)에 있는 554(五五四)명의 소모군(召募軍)까지 모두 여수 사람들로 뽑고 있으며 그 밖에도 순영모군(巡營募軍), 곡화목군(曲華牧軍)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배에 따른 비용이나 양식들을 모두 여수 백성들이 물고 있습니다.

그 외에 정병(正兵)에 이르러서도 수군금위조군(水軍禁衛漕軍), 호보경포(戶保京砲), 경사기장(京沙器匠), 공조장인(工曹匠人), 사후제원(司候諸員), 병영신선(兵營新選)과 동오군(東伍軍), 승오군(陞伍軍) 등으로 진(鎭)들이 많이 베풀어져 있는데 이것은 본부(本府) 백성과 여수(麗水) 백성들이 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역(賦役)에 있어서는 우리 여수 백성들은 좌수영의 부역에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본부(本府) 부역까지도 나가 일신(一身) 양역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한 집에 4, 5명의 가족이 있다하면 아버지는 수영(水營)의 부역을 나가고, 아들은 본부(本府)의 부역을 나가며, 형(兄)은 수영(水營)의 부역을 나가고 동생은 본부(本府)에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어떤 때는 하루 사이에도 아침에는 수영의 부역을 나가고 저녁 때는 본부의 부역을 나가야 할 때가 있으니 이같이 한 몸에 두 지게를 져야하는 것이 이 고장 백성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차라리 본부(本府)의 부역에만 나가게 하던지 그렇잖으면 좌수영의 부역에만 나가게 하던지 한쪽을 감해 주어야지 이렇게 양쪽 부역을 모두 감당한데서야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어떻게 백성이 견뎌내겠습니까. 어디 여수 백성들의 고통이 그것 뿐 이겠습니까? 환정(還政 : 나락을 거둬들이는 것) 한가지만 하더라도 좌수영과 본부가 겹쳐서 받아가는데 이 고장에는 내외면에 걸쳐서 18개의 창고가 있는데 그 중 14개 창고는 본부에 속하고 단지 4개 창고만 좌수영에 속해 있는데 이중 좌수영 창공는 8,000여 석과 방답진 고돌산진 곡화목(曲華牧), 본부주사(本府舟師), 순영모군(巡營募軍), 몫을
합한 만(萬)여석을 오면(五面) 백성들이 홀로 부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 가는 방법이 되(升(승))나 홉(合(합))으로 되지도 않고 우격다짐으로 받아가는데 그것도 가을만 되면 이름도 모르는 각자기 명목을 붙여서 10여량씩이나 더붙여 가는데 이것도 딴 면에서는 볼 수 없는 여수(麗水) 5면(面) 만의 큰 폐단입니다. 또한 여수 5면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하지 않은데가 없어 수원이 메마르고 그 모두가 비전박토로써 논떼기, 밭떼기가 대부분인데 풍년이 들어도 흉년이기가 쉽고 비가 많이 와도 가물 때가 많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풍해를 입거나 해일을 만나 백성이 굶어 죽게 되어도 아직 나라에서 구휼(救恤)을 받은지가 한 번도 없으니 이 일 역시 지극히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도 여수(麗水)에서 본부순천(本府順天)으로 갈려면 60리 70리 혹은 150리가 되는데 아전들의 농간이 집집마다 미쳐 그 폐단이 이를 데가 없습니다. 외진 섬에 사는 백성이나 벽지에 사는 백성들은 본부(本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본관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다만 아는 것은 "나는 본부에서 나왔다.", "나는 좌수영에서 나왔다."고 외치면서 아무데나 제멋대로 휩쓸고 다니는 아전들을 알 따름인데 이들은 억척스럽고 사나운 무리들로서 방울을 흔들면서 떼를 지어 순시를 도는 풍속이 있는데 이때 한 섬이나 두 섬쯤의 나락은 까닭없이 빼앗아 가는 것은 고사하고 다섯냥(五兩錢)이나 열량(十兩錢)쯤의 돈은 말 한마디로 거뜬히 받아가는 것이 예사인데 이때 이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가지고 다니는 일주묵지(一朱墨紙)로 동리 어구에다 방을 써 붙이고 누구누구는 관명을 거역했으니 곧 서울에서 경군(京軍)이 잡으러 올 것이라고 공갈하여 천전(千錢)의 돈을 빼앗아 가니 슬프다 애잖은 백성은 하늘과 땅 사이에 호소할 데가 없어 필경에는 딴 고장으로 야밤 도주하는 백성이 수없이 많습니다.

또 여수 5면에는 본부 면주인(面主人)과 좌수영 면주인이 따로 있는데 이들이 각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을에는 나락을 거둬가고 여흠에는 보리를 거둬가는데 이 짓을 본부와 수영의 면주인(面主人)들이 서로 시샘하면서 함부로 토색질하니 어찌 백성들이 지탱하겠습니까?

이외에도 여수 5면에는 본부면임(本府面任)이라는 것이 있고 좌수영 면임(面任)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데 이들의 비용까지 물어 줘야 하니 어찌 견뎌내겠습니까. 더욱이 근일에 이르러서는 그 횡포가 날로 더 심해져서 족징(族徵), 척징(戚徵), 면징(面徵)이라는 것이 있는데 족징은 같은 집안의 2∼3촌간, 척징은 고종간이나 이종간까지 삼성(三姓)에 미치고 면징은 면임중에 간사한 자가 면임과 짜고 받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본부가 먼 곳에 있는 고로 본관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수 경내에는 섬이 많으므로 바다를 건너서 본부까지 갈려면 꼬박 3일이 걸리는데 진상품(進上品)이라는 것은 원래 값이 배나 비싼 법인데 이것도 좌수영과 본부에서 따로 받아가고 있어 딴 고장에 비하면 여수 백성들의 부담은 배가 되더니 어찌 견뎌내겠습니까.

이와 같은 폐단은 우리 나라에 300의 읍(邑)이 있으나 딴 고장에는 없는 일이요 오직 우리 여수 5면에만 있는 일이니 우리 여수 백성은 이 나라에 없는 백성 노릇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좌수영은 국가의 일대관방(국방의 방비)인데 처음 생겼을 때는 제도가 엄정하고 규모가 컸으며 곡식이 많이 쌓여 수년을 지탱할 만 하고 군비 역시 넉넉했으며 영내에 사는 백성만도 1,000호에 가까웠고 영외에 사는 백성 또한 1,000호에 가까웠으나 모두 살기가 넉넉했고, 군비도 충실해서 마치 우리 나라의 대번창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 이미 기울어가기 시작해 초상을 치루고 난리를 겪은 집과 같이 백성들이 이미 반 이상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곡식을 쌓아둔 창고는 이미 반으로 줄어들어 있는가 하면 군대는 죽은 사람까지를 산사람으로 계산하고 있고, 군량은 없어졌는데도 빈 가마니로 문서를 채우고 있으며 주집은 낡아 빠져 쓸모가 없고 무기는 녹슬어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다행이 이런 태평성대를 만났으니 망정이지 만약 임란이나 정유재란 같은 큰 국란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군기(軍紀)가 저와 같고 창고는 비어 있으니 장자방(張子房)으로 하여 금수를 놓게 하고 한신(韓信)이가 살아서 용병을 한다한들 어찌 능히 그 지혜와 용맹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뜻 있는 자 마땅히 땅을 치고 통곡을 해야 할 일입니다.

아! 슬프다.

양의(良醫)는 죽기 전에 그 병을 알아야 하고, 양공(良工)은 집이 무너지기 전에 기운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의 명이 다한 다음에야 편작(偏鵲)같은 양의(良醫)도 손을 쓸 수 없을 것이요. 제 아무리 양공(良工)인들 어찌 그 재주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수 5면의 사정인즉 이미 기울어진 집과 같으나 한가닥 서까래가 지탱하고 있는 형편이니 이때야말로 양의로 하여금 그 병을 보게 하고, 양공으로 하여금 집을 손질하게 하면 장차 천명을 보존하게 할 수 있을 것이오. 기울어져 가는 집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님께서는 총명하시고 인자하시와 등극하신 후부터 백성들의 중화를 이룩하시고 천지간에 인(仁)을 베푸셔서 가난하고 약한 백성을 도와 오셨고, 일월(日月)같이 밝으심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쳐 주셨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어지신 가르침을 내리셔서 애잖은 백성을 돌보고 계시는 터입니다.

진실로 되돌아 보건데 조선 팔도가 고루 평안한 것을 얻게 하고 백가지 폐단이 다 없어져서 서민들이 새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끔 열읍(列邑)의 정치를 혁신하여 주시는 가운데 오직 우리 여수 5면만이 엎어진 그릇에는 햇빛이 미치지 못하듯 어지신 임금님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있으니 진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좋은 방안 하나를 논할 진데 어리석은 백성의 말이라 할지라도 임금님께서 밝으신 은총으로 받아 주시옵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첫째, 여수(麗水)를 복현(復縣)하는 일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울면서 호소해도 이루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강희년간(康熙年間 1662∼1722 : 현종(顯宗) 3년∼경종(景宗) 2년)에 걸쳐서 여러 번 여수신민(麗水臣民)이 상소한 결과 다행히 임금님께서 들어 주신 바 되어 곧 경계를 갈라서 현(縣)을 만들고 좌수사(左水使)로 하여금 여수부사(麗水府使)를 겸하게 하여 5면을 좌수영에 속하게 하고 13면은 순천부에 속하게 하였는데 순천 아전배들이 천가지 만가지의 간사한 계책을 꾸며 감영(監營)을 속이고 심지어는 조정까지를 속여 1년만에 다시 혁파케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에는 옹정년간(擁正年間 : 1723∼1735 : 경종(景宗) 3년∼영조(英祖) 1년)에 와서 다행히 지평(持平) 이근(李根)이 다시 여수(麗水) 복현(復縣)을 상소하여 또 한 번 복현되었으나 이 때도 순천 아전배들이 또 간사한 꾀를 부려서 이를 훼방놓아 1년도 채 못되는 사이에 혁파되어 버렸습니다.

또 세 번째는 여수민이 상소한 결과 건융년간(乾隆年間 : 1736∼1795 : 영조(英祖) 2년∼정조(正祖) 9년)에 여수 백성들이 상소하여 임금님께서는 밝게 사리를 판단하시고 엄중한 유교를 내리셔서 승지(承旨) 이형원(李馨遠)에게 특명을 내리셔서 여수부사(麗水府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임케 하여 다시 경계를 가르고 복현을 했는데 이때도 못된 순천의 아전배들이 간사한 농간을 부려 1년도 채 못되어 또 혁파케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여수신민들은 다시 살아갈 희망이 없어지고 오늘과 같은 피폐에 이르렀으니 어찌 살아날 재주가 있겠습니까.

실로 복현이 되면 우리 여수 백성에게는 크나 큰 하늘의 복이요, 순천부로 봐서는 조금 떨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수가 현(縣)이 되면 순천부사의 봉급이 오분지 일 깎이게 되고 아전배들의 권한이 또한 오분지 일 감해질 뿐입니다. 이것이 순천 아전배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여수복현을 방해해온 소위 삼복삼파(三復三罷)라는 것입니다.

순천은 13면이나 되는 큰 대읍이요, 여수는 5면밖에 안 되는 적은 현(縣)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것을 아끼려다가 큰 것을 놓치게 되면 어찌 나라의 장래를 도모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장차 백성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잃고 거리를 헤매다가 고을이 비고 땅이 황폐하게 되면 어찌 슬프고 또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우리 나라의 옛 일을 되돌아보더라도 고을을 폐했다가 다시 세운 선례가 있으니 영남(嶺南)의 자인(滋人) 호서(湖西)의 신창(新昌)이 그것이요, 또 수사가 있는 곳을 본관으로 바뀐 데가 있으니 기내(畿內)의 교동(喬洞)과 해서(海西)의 옹진(甕津)이 그것입니다.

여수의 복현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수사로 하여금 본관을 겸하게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수사로 하여금 본관을 겸하게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거나 어려운 일도 아니오, 또한 나라에 손해가 없고 오히려 이롭게 하는 일이오, 궁한 백성들을 살찌게 하는 일이니 어찌 자신교옹(慈新喬雍)의 예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제 여수 백성들이 오래 품어온 한을 풀으셔서 한 현(縣)을 세운다는 것이 중대한 일이기는 하나 이미 일관(一官)이 세워져 있고 공해(官廳 : 관청)가 있으며 창고가 있어 이런 것을 세울 비용이 들지 않으며 아전이나 노비같은 것도 이미 다 갖춰
져 있으니 민폐를 끼치는 일없이 좌수영(左水營)에다 바로 본부(本府)를 세우면 시설을 갖출 필요도 없이 손바닥을 뒤엎는 것 같이 쉬운 일입니다.

특별히 문무(文武)를 겸전한 사람을 골라서 수사와 부사를 겸임케 해서 5면을 다스리게 하는 한편 학문을 일으키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서 무위(武威)를 떨치게 하여 영구한 장래를 도모하면 나라의 행복이 될 것이오, 여수 백성들의 큰복이 될 것입니다.

신(臣) 등이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천리 길을 멀다않고 만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간이 떨리고 피가 끓는 마음으로 어전에 엎드려 있사오니 원컨대 천지부모(天地父母)이시여! 묘당(廟堂)에 특명하시와 여수현(麗水縣)을 복현(復縣)하여 左水營에 전속케 하시고 좌수영 절도사(左水營 節度使)로 하여금 본관을 겸임케 하시와 널리 다스려서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을 울부짖고 울면서 간절히 비옵니다.

바. 삼복삼파 이후 여수 복현운동

1) 복현 운동 지사 유금(流禁)

여수현 삼복삼파 이후 1864년 운초 선생의 여수현 복현 상소가 복현 운동의 효시가 다시 되어 1887년(고종24)에 맹렬한 복현 운동이 벌어졌다.

이때에도 순천부의 거센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복현운동에 주동자인 최창모(崔昌模), 정동열(鄭東烈), 유봉의(兪鳳儀) 등 세 지사(志士)만 화를 입고 유금(流禁)되고 말았다.

2) 18인 동맹(同盟) 여수 복현 운동

1896년 2월에 완도나 돌산과 같은 섬마저 군이 되었으나 유독 여수만은 그렇게 열심히 복현운동을 하였으나 결국 여수군 설군문제가 실패하여 여수는 여전히 순천부 관하에 묶어두자 형편에 맞지 않은 조정의 처사에 분개하여 1896년 3월 18명이 동맹하여 이 고장의 비원을 풀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이들은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하면 고기밥이 되리라(事不若成 藏於魚腹)하는 비장한 각오로 복현 운동에 나섰다. 18일 동맹자는 정시홍(鄭時洪), 류하열(柳河裂), 정충섭(丁忠燮), 류민열(柳敏烈), 주봉성(朱鳳成), 황안성(黃安性), 김병두(金秉斗), 정지섭(丁芝燮), 류계열(柳啓烈), 정시현(鄭時鉉), 황운수(黃雲秀), 김재호(金在浩), 최현호(崔炫浩), 황의연(黃義淵), 정관영(鄭寬榮), 정관섭(丁寬燮), 주재석(朱載錫), 정시행(鄭時幸) 등이다.

이들 맹원(盟員)들은 서울로 올라가 관계 요로와 손을 잡고 맹렬하게 복현운동을 벌이는 한편 일부는 지방에 남아 진정서를 작성하여 각계에 보내고 지방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때 마침 초대 돌산 군수로 임명된 조동훈(趙東勳) 군수가 도임차 여수 종포에 도착하였는데 맹원들과 지방유지들이 합세하여 조 군수에게 성찬을 베풀어 접대하면서 이곳 여수는 보시다시피 동학란으로 시가지는 온통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생활의 터전을 잃고 허탈에 빠져 있는데다가 작년(1895년)에 설상가상으로 전라좌수영마저 폐쇄돼 이곳 여수 백성들은 마치 부모잃은 자식처럼 의지할 관부가 없고 백리에 가까운 순천에 속해있으니 차라리 이 고장도 돌산군에 편입시켜 조 군수께서는 여수에 앉아 돌산까지 다스려 달라고 애원했다는 것이다.

조 군수는 여수 백성들의 처절한 호소를 차마 인정상 뿌리칠 수 없어 「이곳도 다 같은 이 나라 땅이거늘 내 어찌 경계만 논할 수 있겠는가」하고 이러한 애절하고 절박한 사실을 전라감사와 조정에 보고하여 여수 4면(율촌, 소라, 삼일, 여수)도 돌산군에 편입시켜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여수에 주저앉아 백성들을 돌보고 진남관의 허물어진 부분을 손질하는 등 돌산군수보다는 오히려 여수 군수 노릇에 충실하다가 다음해 3월에 친상을 당해 조 군수가 떠나고 말았다.

3) 윤웅열(尹雄烈) 관찰사 여수복군 조정 건의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13도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전라남북도가분리되어 초대 관찰사에 윤웅열이 임명되어 여수 백성들의 분군운동을 살피기 위해 여수에 도착하고 보니 갑오년 동학때 시가지는 불태워져 버리고 좌수영마저 철폐돼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모두 이곳을 떠나려 한다는 사정을 파악한 후 여수 백성들이 순천에서 분읍하려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정하여 여수복군을 조정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4) 제1차 설군 여론조사

이때 조정에서는 지방주민의 설군운동이 너무나 맹렬할 뿐만 아니라 군수쟁탈전까지 벌어졌으며 관찰사의 건의까지 있었으니 그대로 내버릴 수 없었던지 지리적으로 순천에 편재하지 않은 임홍준 옥과(玉果) 군수를 여수 백성들의 여론조사관으로 임명하여 여수로 내려보냈다.

임홍준(任洪準)은 먼저 여수와 순천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고 여수의 지형지세를 살펴본 다음 지방민의 숨은 뜻을 알아보기 위하여 여수(麗水), 소라포(召羅浦), 삼일포(三日浦), 율촌면(栗村面) 등 4개 면민을 덕양역으로 모이게 하여 순천군과 여수군의 이름을 크게 쓴 푯말을 각기 따로 세워 놓고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여수군이 새로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여수군 푯말 밑으로 가고 순천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순천 푯말 밑으로 가서 서라고 일렀다. 그러자 거기 모인 전원이 순식간에 여수푯말 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여기서 여수의 참된 민의를 파악한 임홍준은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여 여수 복군을 건의하였다.(참고 임인지(壬寅誌) 24, 25쪽) 복군이 된 뒤 지방민은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그의 기지에 찬 조사활동을 칭송하였다.

5) 제2차 설군 여론조사 후 여수군 설군

그러나 조정에서는 단 한 번만의 조사만으로 미흡했던지 그 해 5월에 또 담양군수(潭陽郡守) 유기완(柳冀完)으로 하여금 다시 복군여부를 조사토록 지시하였다. 유기완은 4개 면민을 이번에는 成生院(현, 율촌면 新山一區 後洞部落)에 모이도록 한 다음 전과 같이 순천군에 그대로 속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순천군 깃발 아래로,
여수군이 새로 서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수 깃발 아래로 모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거기 모인 전원이 앞을 다투어 여수군 깃발 아래로 모인 것이다. 유기완은 이 사실을 「차개비지운응시지고여(此豈非地運應時之古嶼) : 이 어찌 땅의 운이 시대의 운을 따라가지 않으리오」라는 말로 여수복군을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여수군이 신설하게 되었다. 그 뒤 여수 주민들은 그의 비(碑)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사. 천신만고 끝에 여수군 신설

고려때부터 있던 여수현을 1397년(태조5)에 페현시켜 순천부에 예속된 후 500년에 걸쳐 순천부와 전라좌수영 두 관청의 부역과 조세를 이중으로 부담하는 폐단속에서 뼈져린 복현운동의 결과로 1897년(고종 34)5월 16일 마침내 여수군(麗水郡)을 설군하라는 칙령(勅令) 제12호가 공포되었다.

칙령 제1조에 「전라남도 구역내 저 좌수영에 여수군 군청을 설치하고 순천부 율촌, 여수, 삼일, 소라 4개면으로 해군구역(該郡區域)을 획정한다.」라고 되어있다.

김충조 국회의원 홈페이지에서 퍼옴
2016-12-15 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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